※지난 8월 5일 이강륭 회장님의 고택인 강릉 선교장을 다녀왔습니다. 선교장의 여름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선교장 이야기를 몇 회에 걸처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여행기는 오마이뉴스에도 갈무려서 게재를 하였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대관령 옛길을 넘어 강릉 선교장을 가다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에서 하루 밤 묵으며 오욕에 물든 세속의 찌꺼기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희를 살아오는 동안 쌓아온 두터운 업장을 어찌 일순간에 씻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고요한 산사에 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번뇌만 더욱 죽 끓듯이 이글거린다. 우매한 중생은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에 한 점으로 남아 있음이 오히려 도심 속의 한 점 티끌 섬이 되어 더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번뇌가 죽 끓듯이 무진할 바에야 속세에 머리를 처박고 있음이 오히려 약이 되지 않을까? 가부좌를 풀고 대관령이나 넘어가 바닷바람이나 쏘이자. 나는 다음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대관령 옛길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타면 시간이야 빠르겠지만 어두운 땅굴을 지나가는 것이 답답할 것 같아서였다.
와우! 대관령(832m) 고개 마루턱에 다다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운무에 싸인 동해바다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오랜만에 넘어보는 대관령 옛길이다. "오길 잘했어.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 역시 나는 색(色)을 좇는 속물인가 보다.
대관령은 예나 지금이나 영동과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다.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신증동곡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조선시대 인문지리서)에 나오는 이 내용은 고개의 규모가 크고, 영동~영서를 잇는 주요 관문이라는 데서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관령에서 바라본 강릉시와 동해
일찍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울고 왔다가 울고 떠난다"고 읊었던 대관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험준한 대관령을 울며 넘어왔다가 떠날 때에는 강릉의 따뜻한 인심에 이별을 안타까이 하며 울며 떠나가곤 했다는 고개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넘어 다녔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넘나들었다.
강릉에는 율곡이 탄생한 오죽헌을 비롯하여, 관동제일루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방해정, 금란정, 취영정 등 명승지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유독 조선시대 고택인 선교장이 마음에 꽂힌 것은 열화당 뒤뜰에 핀 배롱나무 꽃의 유혹 때문일까?
비단 그뿐 만은 아닐 것이다. 이 고택이 필자와 한 직장에서 근무를 했던 지인(선교장 집주인 이강륭 회장)이 살았던 집이기도 했기에 연줄을 따라 선교장이 불현 듯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우연히 선교장에 들렀을 때 열화당 뒤뜰 거대한 배롱나무에 핀 그 붉은 꽃의 유혹을 잊을 수가 없다.
ㅁ배롱나무 꽃이 유혹하는 강릉 선교장
배롱나무 꽃은 온천지가 녹색일변도인 한여름에 화려하게 피어나 100일 동안 붉은 꽃 잔치를 벌려준다. 필자는 선교장 뒤뜰에 핀 붉은 배롱나무 꽃의 유혹에 못 이겨,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처럼 꼬불꼬불한 대관령 옛길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는 아흔 아홉 구비를 한 달음에 내려와 곧장 선교장에 도착케 한다. <계속>